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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너는 키 188.3cm, 등번호 11번으로 카라스노 배구부 미들 블로커였다. 배구부에는 그 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저마다 방식은 달랐으나 배구를 향한 마음은 같았다. 전국대회에 나간 우리는 모두가 노력한 끝에 우승을 끌어냈다. 당시 나는 그동안 확립했던 너에 대한 수식어를 새로 쓰기에 바빴다. 날마다 새로운 일이 벌어졌으며 너 역시 그곳에 함께했다. 그 순간이 영원할 거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너는 배구를 그만두었다. 사랑하던 형이 선물해줬던 스포츠 안경을 다시 쓰는 날은 돌아오지 않았다. 잦은 부상으로 테이핑 자국이 남아있던 손가락은 말끔해졌다. 정기 구독하던 월간 배구와 방 한쪽에 놓였던 배구공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가끔 휴일에 만나도 배구 시합을 보러 가는 일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스포츠 기사를 찾아보지도 않았고 스포츠 뉴스가 흘러나오면 채널을 돌렸다.

이제는 네가 배구를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기억을 겹겹이 감싸 세월에서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나와 달리 너는 어렵지 않게 과거를 흘려보냈다. 가끔 같이 배구를 했던 부원에게 네 안부를 묻는 연락을 받으면 나는 네가 지워낸 기억 속에서 흐릿한 모습을 상기하려 애썼다. 여기저기 빈 기억을 몇 번이고 끈질기게 쫓은 끝에 겨우 정확히 너를 인지할 수 있었다.

야마구치.

네 근황을 묻는 다이치 선배의 연락에 정처 없이 자판 위로 손가락을 놀리던 참이었다. 강렬한 스파이크를 막아내던 네 모습을 겨우 떠올렸으나 순식간에 산산이 흩어졌다. 갑작스레 불린 이름에 몸을 움츠리며 고개를 들었다. 책상 한쪽에 있는 TV에 유명 야구선수의 은퇴를 알리는 자막이 지나갔다. 자막이 지나자마자 스포츠 뉴스가 바로 이어졌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리모컨을 집어 네게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리모컨을 건네받은 네가 채널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짧게 점멸하고 예능 프로그램 출연진이 한껏 소리 높여 웃어넘겼다. 필요한 물건으로만 깔끔하게 정리된 집안이 순식간에 웃음소리로 가득 들어찼다.

기다란 손가락이 채널 버튼을 일정한 간격으로 눌렀다. 채널은 몇 번 더 바뀌어 예전에 상영했던 영화에 멈췄다. 시작한 지 꽤 되었는지 영화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호텔 침대에 기대앉은 노배우에게 여배우가 남편의 외도를 토로했다. 물기 어린 목소리는 대체로 침착하게 이어졌다. 소리는 방을 채우기에 너무 조용하거나 시끄럽지 않아 적당했다. 너 역시 같은 생각이었는지 기계적으로 누르던 리모컨을 탁상에 내려놓았다. 다른 것에 흥미를 느껴본 적이 없다는 듯 화면을 보는 얼굴은 무감했다. 막연히 숨이 막혀와 고개를 숙이고 옆에 내려두었던 휴대폰을 들었다. 잠금 화면을 해제하면 선배에게서 온 메시지가 그대로 밝은 화면에 떠올랐다.

머릿속을 유영하는 단어를 가려 문장을 만들어냈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해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그러나 너는 놀랍도록 무엇이든지 쉽게 해냈다. 다른 부원과 연락을 그만두는 일 역시 네게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려했던 바와 달리 지난 기억을 잘라내고서도 너는 문제없이 잘 지냈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 뒤에 있는 침대에 몸을 기댔다. 나름대로 열심히 꾸몄으나 답신에 담긴 문장은 평이했다.

짧은 메시지에 답을 했을 뿐인데 핀치 서버로 코트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몸에 힘이 풀렸다. 자리에 늘어져 느리게 시선을 옮기니 영화가 끝났는지 광고가 이어졌다. 여전히 무심한 표정으로 광고를 보던 네가 리모컨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소매가 끌려 올라가며 마른 손목이 드러났다. 지금까지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도록 색소 옅은 피부에 검푸른 자국은 이질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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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 萬戀集 ハイキュー!! 影山 飛雄 x 月島 蛍 10人 同人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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